전설ㆍ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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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형제바위

    이 삼형제바위(일명 삼형제섬)는 근흥면 용신리 2구에 있는 속칭 원안 앞 바닷가 왼쪽에 우뚝 솟아 있는 3개의 바위를 일컫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3개의 바위라고는 하지만 3개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래 부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위부분만 3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1개로 보이는 것이다. 또한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지만 바닷물이 나가면 육지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한 때의 성어기에는 이 곳 포구에서 많은 어민들이 살았던 흔적이 지금도 역력히 남아 있다. 즉, 독살과 집터의 흔적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옛날 이 포구에서 어부 한 가정이 살고 있었는데 생업은 비록 고달픈 어업이었지만 그들은 불평불만 없이 언제나 단란하고 행복하게 웃음꽃을 피우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부는 늘 하던대로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멀리 나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여느 때 같으면 배가 이미 돌아왔어야 하는데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밤은 깊어만 갔다.

    어부의 아내는 초조한 마음과 불길한 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날이 밝자마자 어부의 아내는 남편을 찾아 배를 타고 멀리 바다로 찾아 나갔다.
    바다로 찾아 나갔지만 망망대해에 어디서 찾을 것인가 막연하였다. 날씨는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일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여 바다는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겨울날씨라 겉잡을 수가 없었다. 남편을 찾아나선 지어미는 할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귀향을 서둘렀으나 너무 멀리 나갔기 때문에 단 시간에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고 이에 따라 파도가 심하여 배는 귀항도중 전복되고 어부의 아내는 실종되고 말았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아들들은 해는 저물고 날씨는 점점 추워오는데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방안에서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3형제는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는 풍랑으로 험악하고 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3형제는 나란히 서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부모님을 불러 보았다. 대답이 있을리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 3형제의 마음은 불길한 예감으로 그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시간은 수없이 흐로고 찬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그러나 이들 3 형제는 집으로 돌아갈 것을 잊은채 부동자세로 서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다 그대로 얼어 죽고 말았다.
    이렇게 부모님을 기다리다 죽은 3형제의 시체는 그 자리에서 3개의 돌로 변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 가정의 5식구가 몰사하고 만 것이다.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분명히 간장을 에어내는 인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삼형제가 죽어서 돌로 변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3형제 바위라고 불렀던 것이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 며느리 넋이 꽃이 되다

    근흥면 정죽리 1구에 정산포란 조그마한 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는 아랫 마을과 웃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인구는 약200여명이 살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농업을 겸하고 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는 김의 양식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포구는 아래 윗마을 합쳐야 모두 1킬로 남짓한 길이인데 마치 활같이 구부러져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비교적 조용한 포구였다. 그런데 옛날 이 포구에 며느리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시키기로 이름난 시어머니와, 그와는 대조적으로 마음씨 착하고 효성스런 며느리로 널리 알려진 고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옛날 신진도에는 100년 묵은 구렁이가 있었는데 이 구렁이는 용이 되고 싶었으나 도를 닦을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어느날 이 구렁이는 산신령에게 자기의 처지를 말했다.
    "산신령님 제가 100년을 살아왔는데 이대로 죽기는 억울합니다. 용이 되고싶습니다. 다시 100년동안 도를 닦아야 용이 될 수 있다는데 어디로 가서 도를 닦아야 할는지요?"
    그러자 산신령은 이 구렁이에게 조건부로 도닦을 장소를 일러주었다.
    "좋다, 내가 그 장소를 알려줄터이니 나와 약속을 하자."
    "무슨 약속인가요?"
    "네가 도를 닦아 용이 되면 안흥 앞바다에 풍랑이 심하여 좌초하는 배가 만호다. 그러니 네가 용이 된 다음 풍랑을 잠재워 주면 내가 그 장소를 알려 주겠다." "좋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여 산신령은 바로 마주 보이는 안흥성 밑에 그런 장소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곳에 가면 사방 몸둥이 길이와 똑 같다니 제가 가서 제 몸길이와 같은 굴을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이 굴의 길이를 정확히 모르지만 그 구렁이가 몹시도 컸던 모양이다. 그 후 이 구렁이는 다시 100년동안 도를 닦고 승천했다 하는데 산신령과의 약속 때문인지 안흥 앞바다의 풍랑이 이때부터 한결 줄어들었고 난파선도 줄어들었다는 참으로 전설같은 전설이다.

  • 학 암

    학암이란 글자 그대로 바위의 생김새가 학같이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학암은 원북면 방갈리 2구 가시내의 학암포에 있다. 이 학암포에는 큰 분점과 작은 분점이 있는데, 큰 분점의 서쪽 끝 낭떠러지 용낭굴위의 바위를 일컫는 것이다. 학암포란 명칭은 이 학암에서 연유된 것인데, 1968년 7월 27일 해수욕장의 개장과 더불어 붙여진 명칭이다.

    그 이전에는 분점포였다. 이 분점포는 본래 조선조때 중국과의 교역을 하던 무역항 이었다. 학암이란 바위가 학같이 생긴 그 유래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분점포가 무역항과 어업 기지로서의 활기를 띄기 전의 이야기이다.

    심성이 좋은,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순진한 할아버지가 이 포구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나는 하늘에서 옥황 상제의 명을 받고 이 곳에 내려왔오. 노인께선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이 달 보름날 밥에 하늘에서 학 한마리가 큰 분점 용낭굴 위 바위에서 내려와 앉을 것이오. 그러나 이 학은 그 곳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그 바위서 죽는데, 바위가 학으로 변할 것이오. 그 뒤부터 이 포구는 앞으로 100년간 번창하겠으나 그 후는 쇠퇴할 것이오" 하면서 사라져 갔다.

    이런 꿈을 꾼 할아버지는 너무나 신기한 꿈이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보름날이 왔다.
    잠자리에 들었던 노인은 문득 꿈 생각이 나서 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날따라 달빛은 유난히도 밝았다. 노인은 큰 분점 용낭굴 위를 주시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흰구름 같은 것이 길게 용낭굴 위쪽으로 내려오면서 하늘과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구름속에 무슨 물체같은것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노인은 날이 밝자마자 궁금해서 재빨리 그 곳을 찾아갔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학모양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학암이라고 불리워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장구도

    장구도는 이원면 내리의 앞바다에 있는 마치 장구 모양의 조그마한 섬을 일컫는 것이다. 이장구도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면 조선조의 세조때에 순절한 충의공 김문기의 후손 김홍관의 영조때 중추부사의 자리에서 국록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정의에 민감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관리였다.

    마침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대황이 등극한이후 홍국영의 세도가 날로 팽창해지자 이에 반기를 들고 관직을 버린채 조용한 시골로 낙향한 것이 바로 이원면 내리였다. 이렇게 낙향한 그는 우선 서식처를 구하기 위해 후망산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앞바다에 마치 장구 모양의 조그마한 예쁜 섬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장구란 보래 평화롭고 즐거울 때 사용하는 악기이므로 이 섬에 들어가 살게 되면 홍국영의 세력이 제아무리 크다하더라도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일신상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이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 내리에는 김홍관을 중심으로 그의 측근자들이 많이 살게되어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지금도 이 곳에는 그의 후손들이 50여 가호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장구도에 관한 이설이 있다. 이 장구도는 본래 "장군도"였다는 것이다. 이 섬을 장군도라 부르게 된 연유는 섬의 모양이 마치 장군같이 생겼다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인데, 장군이란 물.술.간장 등을 담아 옮길 때 쓰는 오지 또는 나무로 만든 그긋을 말한다. 요즘은 장군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그 생김새를 알 수 없지만, 참고로 민속박물관에 가면 그 실물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군도가 긴 세월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장군의 "군"자에서 니은 "ㄴ"이 탈락되어 편의상 주민들이 장구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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